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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아이랑 거의 5시간 30분만에 오른 설악산 대청봉 2편

출처 : 설악산국립공원 공홈(www.knps.or.kr)


(설악산 대청봉 최단코스 _오색원점회귀)

서울에서 6시 출발하여 8시 조금 넘어 오색 그린야드호텔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은 매우 한산했다. 평일이기도 했지만, 설악산으로 관광하러 왔거나 가벼운 산책 또는 등산하러 온 사람들은 설악산 소공원으로 갔을 것이다. 내가 설악산 러버가 돼버린 것도 소공원에서 시작되는 외설악의 코스를 다니기 시작하고부터였다. 설악산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 권금성, 아이와 첫 등산이었던 흔들바위, 아이와 두 번째 도전 만에 성공한 울산바위 코스, 계곡 소리를 들으며 걸었던 비선대, 끝내주는 천불동계곡 일원의 뷰를 볼 수 있었던 금강굴, 아이와 완등을 포기했던 천불동계곡 그리고 토왕성 폭포 코스까지 멋지지 않은 구석이 없는 코스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이 설악산 소공원에 더 많이 모이는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다.
산에 다닐 때 김밥 같은 도시락을 좀 더 성의껏 준비해가기도 하는데, 이날은 여정이 길어질 것 같아 최대한 일찍 입산하는 것이 목표였다. 평소보다는 더 간단히 준비해온 커피와 함께 감자와 고구마, 사과로 대충 아침을 때웠다. 아이는 이른 아침 차를 타고 이동해 와서 그런지 입맛이 별로 없는 듯 보였다. 좀 더 잘 먹어주었더라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최근 아이가 에어프라이어에 구운 감자를 잘 먹어서 선택한 메뉴였는데, 이날은 실패였다.

설악산대청봉최단코스 오색 그린야드 호텔 유료주차장
주차장 입구로 나와 왼쪽 오르막길로 쭉 걸어올라가면 남설악탐방지원센터(대청봉 최단코스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새벽에 고양이 세수에 옷만 대충 걸쳐 입고 나온 아이의 머리 손질을 해주고, 복장과 배낭도 재정비한 후 우리는 등산로 입구로 향했다. 오색 그린야드호텔 주차장 입구에서 왼쪽 오르막길로 걸어가면 남설악탐방지원센터가 보인다. 대청봉까지 5km 구간 동안 화장실이 단 한 곳도 없으므로, 남설악탐방지원센터의 공용화장실을 반드시 들렀다가 출발해야 한다. 아이가 화장실이 지저분하다면서 투덜거릴 정도로 관리는 좀 부족해 보였다.

설악산 소공원에서는 입장료를 내고 코스를 시작해서, 으레껏 지원센터에 들러 입장료를 끊으려고 했더니 직원분이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국립공원의 입장은 무료라고 알려주셨다. 설악산 전체의 1/3 면적이 신흥사 소유라고 한다. 외설악코스가 시작되는 설악산 소공원의 입장료와 주차비는 이와 관련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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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AM 입산


남설악탐방지원센터에서 채비를 마치고 우리는 드디어 코스를 시작했다. 오색 코스는 전망도 없고, 몹시 가파르고 계단이 많아 볼거리는 없고 힘들기만 하고 대청봉에 최단 시간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 유일한 장점이라는 후기를 여럿 봐와서 등산로에 대한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었다. 아이 그리고 아이의 이모(나의 여동생)와 함께했는데, 우리 셋이 오색코스에 반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코스 시작과 함께 시작되는 숲 터널과 마주한 순간부터였다. 갑자기 지리산 노고단 일출을 보고 반야봉으로 방향으로 걸었던 능선이 생각났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토토로에서 메이가 토토로를 만나기 위해 숲으로 둘러싸인 굴로 들어가는 장면과 흡사한 초록한 숲 터널 길에 처음 반했던 길이다. 오색코스를 걸으며 지리산의 능선을 조금 더, 아니 많이 경사지게 세워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뭔가 익숙하면서도 반가운 초록 터널을 만나서 이 길이 더 좋았을지도 .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 포기하는 일이 가장 어리석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힘들기만 하다는 후기만 보고 이 길을 포기하려고 했던 과거의 내가 얼마나 후회스럽던지.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직접 해보면 금방 답이 나올 것을.

설악산 오색코스 초반부부터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


오색 코스의 대부분은 돌길에 경사가 꽤 심한 길 그리고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이가 계단은 달가워하지 않지만, 경사진 돌길을 재미있어했다. 아이의 표정을 보니, 이 길이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설악산 오색코스 경사가 심한 돌길


주차장에서는 날씨가 꽤 쌀쌀하게 느껴져 바람막이를 입고 지퍼까지 꼼꼼히 채워서 걸었는데, 입산 직후 다시 벗어서 가방에 넣었다. 산에서 느끼는 체감온도의 변화가 빈번하므로, 가볍게 입고 벗을 수 있는 바람막이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설악산 오색코스 구간별 설치되어 있는 쉼터(데크) 남설악 6



오색코스는 전망이 없고, 편히 앉아 쉴 공간이 없는 대신 설악폭포 상단까지 쉼터가 설치되어있다. 쉼터가 나올 때마다 5분 전후로 쉬다가 다시 걸었다.


남설악1 9:13 am → 남설악6 9:49 am → 오색1쉼터 10:24 am → 설악폭포상단 12:44 pm → 제2쉼터 a 1:1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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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 AM
오색 1 쉼터에서 이른 점심

남설악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한지 약1시간 30분만에 도착한 오색 제1쉼터


아침을 대충 때워서 그런지 아이는 생각보다 빨리 배고파했다. 내 배낭의 컵라면을 먹고 싶은 마음이 더 커 보였다. 우리의 목표 점심시간은 11시였지만, 조금 이르게 오색1쉼터에서 집에서 챙겨온 음식들을 먹기로 했다. 아이의 배를 채워줘야 힘이 날 것 같기도 했으므로.
지난번 지리산 능선을 걸을 때도 바닥이 습하고 날아다니는 벌레(파리 등)들이 많았는데, 오색코스도 마찬가지였다. 습한 곳엔 파리나 모기 등 벌레들이 유난히 많이 서식하는 것 같다. 덕분에 우리는 쉼터마다 느긋하지 못하고 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 파리 등의 날아다니는 벌레들이 얼굴이고 어디고 겉으로 드러나 있는 살갗에 닿을 때마다 거슬렸는데, 아이가 몹시 불쾌해했다.
그런 악조건 환경의 오색 1 쉼터에서 컵라면에 물을 부어 먹을 준비를 했다. 아이는 튀김우동, 나는 새우탕, 아이의 이모는 육개장. 각자가 골랐다. 나는 육개장은 선뜻 손이 가질 않던데, 면발이 얇아 비상시 물이 미지근해도 대충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익는다고 한다. 산에 갈 때는 무조건 작은 사이즈 컵라면으로 준비한다. 국물이 남아도 산에다 버릴 수 없으므로, 비닐에 새지 않게 담아오거나 국물까지 다 마셔야 한다. 지난번 언제는 가져갔던 보온병의 깨끗한 물을 버리고 남은 국물을 보온병에 담아왔는데, 보온병에 냄새도 배고 무겁고.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머리를 좀 굴려서 스프를 좀 남기고 국물을 적게 넣었다. 웬만하면 국물까지 다 먹는 방향으로. 각자의 라면을 먹는데, 아이가 내 것을 탐내며 한 입만 달라더니 바꿔 먹자고 한다. 그래서 반강제로 내가 튀김우동을 먹었는데, 좀 더 자극적인 새우탕에 비하니 훨씬 맛이 없게 느껴졌다. 아이의 입맛은 정확하다.

이번엔 처음으로 지퍼락에 밥이랑 김치를 각각 담아왔는데, 탁월했다. 면이 1/3쯤 남았을 때 따끈한 국물에 밥을 말아서 김치랑 함께 먹으니, 세상 든든했다. 스프를 덜 넣고 물을 적게 했는데도 결국엔 국물이 조금 남아서 비닐에 휴지를 넣고 국물을 버려서 꽁꽁 싸매서 가방에 넣어 해가 저물 때까지 가지고 다녀야 했다. 다음엔 스프와 물양을 더 줄여 국물까지 깨끗하게 비워야지. 입가심으로 보온병에 담아온 아이스아메를 한 모금 마셨는데, 그렇게 꿀맛일 수 없었다.

대청봉까지 가는데 오색1쉼터는 1/3 지점. 아이랑 1.6km를 걷는데 1시간 30분 소요. 앞으로 비슷한 페이스를 유지하며 걷는다고 가정하면 2시쯤엔 대청봉에 도착할 수 있겠지만, 변수가 없어야 가능할 같아 보였다. 조금 쉽게 말하면 아이랑 대청봉에 오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남설악탐방지원센터 → 오색제1쉼터(1.6km 지점) → 설악폭포( 2.7km 지점) → 설악06-06(3.2km 지점) → 대청봉(5km 지점)

그래서 우리는 아이의 이모(나의 여동생)랑 헤어지기로 했다. 사실 전부터 아이랑 대청봉 최단코스는 무리일 것 같으니, 적당한 지점에서 헤어지기로 계획했었다. 그 지점이 오색제1쉼터가 된 것이다. 셋 다 중도 하산하기보다는 맴버중에 한 명이라도 대청봉을 정복한다면 대리만족이라도 할 요량이었다.

설악산 대청봉 최단코스 돌길


지난번 양폭코스(편도6.5km)에서도 비슷했다. 아이가 힘들어해 귀면암쯤에서 헤어져 아이의 이모는 양폭산장까지 다녀오고 우리 둘은 천천히 하산하는 길에 계곡에서 놀다가 아이의 이모를 중간에 만나 같이 하산했었다. 아이와 함께 산행을 여러 번 다니다 보니 같이 즐거울 방법을 조금씩 배우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적당한 지점에서 각자의 속도대로 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암묵적으로 생겨난 규칙은 서로의 마음을 조금 더 편하게 했고,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이모를 너무 좋아해서 셋이 등산하면 이모한테 딱 붙어서 걷는 아이도 이 시점에서는 쿨하게 받아들인다. 아이도 이모 속도에 맞출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 같다.
나보다 좀 더 젊어서(?) 그런지 아이의 이모는 페이스가 빠르다. 우리 둘은 가는 데까지 가다가 아이가 싫다고 할 때 하산하고 여동생은 대청봉을 찍고 내려오면 결국 지난번처럼 만날 것 같다면서 서로 인사하고 헤어졌다. 아이의 이모는 금세 사라졌다.
아이와 둘이 걷다 보니 꼭 둘이서 온 것 같았다. 아이는 나랑 둘이서 산길을 걸을 때 유난히 말이 많아지는데, 힘들지만 아이와의 동행이 즐거운 이유 중 하나이다. 끊임없이 종알거리는 아이의 말을 귀담아듣다 보면 평소엔 몰랐던 아이의 속마음을 알게 되기도 한다.
여기 오기 전에 아이가 친구에게 설악산에 간다고 자랑했는데, 그 친구가 아마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하고 내려올 거라면서 놀렸다고 한다. 그 친구가 그렇게 말해서 자기는 대청봉까지 갈 거라고. 우리는 너무 멀고 힘들어서 못 갈 것 같다고 차마 말해 줄 수 없었다. 어떤 친구는 무리하지 않고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말해줬다면서 "엄마 무리하는 게 뭐야?"라며 물어보기도 했다. 일곱 살 친구들의 진지한 대화에 새삼 놀랐다.

설악산 오색코스에서 자주 만난 보라금풍뎅이




우리는 느리지만 쉬지 않고 계속 걸었다. 가는 길 곳곳에는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등껍질이 매력적인 아주 작은 곤충이 자주 눈에 띄었다. 아이는 귀엽다면서 작은 곤충이 보일 때마다 멈춰서 관찰했다. 인제야 이름을 알아보니 보라금풍뎅이라고. 여러 개의 작은 다리를 부지런하게 꼬물꼬물 움직이는 보라금풍뎅이도 많았지만, 안타깝게도 등산객의 발에 밟힌 듯 보이는 아이들도 꽤 여럿 보였다. 아이는 "누가 이렇게 밟아 죽인 거야...?" 라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다. 아마 발걸음이 바빴던 누군가 발견하지 못하고 그런 것 같다. 보라금풍뎅이 덕에 우리의 속도는 더욱 늦춰졌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알려줘야겠다. 그 작은 곤충의 이름은 보라금풍뎅이였다고.

(이 글을 쓰고 오후에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그때 설악산에서 봤던 귀여운 곤충 이름이 "보라금풍뎅이"라고 알려주었더니, 금빛과 보라색의 반짝이는 등과 너무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면서 무척 신나 했다. 알려주길 잘했다 :D )


* 보라금풍뎅이 : 숲이 잘 발달한 산지에 서식하며, 동물의 사체나 배설물 등 주로 부식성 먹이에 모여들며, 소똥구리 등과 유사하게 동물의 배설물을 둥글게 뭉쳐 땅속에 묻은 후 산란한다. 출처:네이버지식백과

 

설악산 오색코스에서 만난 다람쥐



보라금풍뎅이가 여럿 보이던 흙길을 지나 돌길과 계단을 오르다 보니, 외설악 코스에서도 자주 보였던 다람쥐를 만났다. 아이는 우리가 지난번에 봤던 다람쥐인 것 같다면서 무척 반가워하며 기뻐했다.
"그 다람쥐일 수도 있겠다! 우리가 이곳에 온 줄 알고 인사해주러 왔나 보다..."
아이를 실망시키기 싫어서 그냥 얼버무렸다. 늘 그래 왔듯 다람쥐가 자리를 뜰 때까지 우리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설악산 오색코스 대청봉 3.3km 지점 오전 11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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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4 PM
설악폭포상단쉼터

오색 제 1쉼터(남설악탐방지원센터에서 1.6km 지점)부터 2시간 좀 안 되게 걸어 도착한 설악폭포상단 쉼터.

 

 우리 둘 다 지쳤다. 어디까지 가야할지를 고민하기보다 되돌아갈 생각에 까마득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쭉 오르기만 한 게 아니라, 오르다가 내려가는 길이 꽤 여러 번이었다. 힘겹게 오르다가도 내리막이 나오면 아이는 대청봉 정상에 갈 건데 왜 내려가냐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그때 나의 속마음은... "무사히 되돌아갈 수 있겠지..."

대청봉 2km 이전 지점 이정표가 나온 후 20분 정도 걸으니 설악폭포상단 쉼터에 도착했다. 쉼터에서 쉬면서 아이의 이모가 어디까지 갔는지 확인차 전화를 해봤는데, 안테나가 잡히질 않았다. 아이가 투덜거리길래 좀 더 가서 안테나가 잡히면 이모랑 통화해보자고 달래면서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이가 걸으면서 말했다. "이게 다 친구 때문이야. 난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갈 거야. 친구 말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 친구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냥 가다가 힘들면 조심히 내려오라고 말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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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2 PM

오색1쉼터에서 헤어졌던 이모(나의여동생)의 대청봉 도착 소식 아이의 이모에게 대청봉 인증사진 카톡이 왔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이제 되돌아오는 아이의 이모랑 만나서 하산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이모더러 내려오지 말고 대청봉에서 기다리라고 전해줘, 이모만 대청봉에 가게 할 수 없어. 나도 끝까지 갈 거야!"


아이의 굳은 의지를 여기서 꺾어야 할지 고민이 들었다. 지금 되돌아간다고 해도 까마득한 길인데, 대청봉까지 갔다가 무사히 하산할 수 있을까.
짧은 시간 고민 끝에 시간을 계산해보니 대청봉에 2시까지만 갈 수 있다면 하산까지 가능한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아이의 이모에게 혹시 모르니(우리가 대청봉 정복이 가능할 수도 있으니) 대청봉에서 아주 쉬엄쉬엄 내려오라고 아이의 의사를 잘 전달했다. 우리 둘은 다시 걸기 시작했다. 이모가 대청봉에 도착했다고 하니, 아이는 뭔가 힘이 나 보였다. 이때부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갈 거라면서, 이게 다 친구 때문이라는 말을 좀 더 여러 번 반복했다. 아이는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며 고된 여정으로 고민되는 마음을 가담은 듯 보였다.


그러면서 내적 갈등이 많아 보였다.

하. 그냥... 그만 내려갈까. 포기할까?

 

설악산 오색코스 등산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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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PM
오색 제2쉼터 a
(남설악지원센터부터 3.7km 지점)

설악폭포상단 쉼터에서 30분만에 도착한 오색 제 2쉼터a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질 않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청봉까지는 못 갈 것 같았다.
이모의 대청봉 정복 소식을 듣고 한참을 분발해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1.3km나 남았다. 우리는 오색 제 2쉼터에서 짧은 휴식을 취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고, 고도가 높아지니 핸드폰이 다시 터지기 시작했다. 아이의 이모랑 통화해보니 천천히 하산하고 있으며, 곧 만날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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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PM
대청봉 정복하고 온 이모와 상봉 (설악 06-08, 해발 1,492m)


이모가 대청봉에 다녀왔으니 그냥 하산하는 것이 어떤지 물었는데, 아이는 정색을 표했다. 이모한테는 대청봉에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왜 내려왔냐면서 원망을 하면서 말이다. 이모가 내려와 버렸으니, 자기랑 같이 다시 대청봉에 가줘야 한다고. 지나고 나서 이런 아이의 의지가 있어서 대청봉에 갈 수 있었다고 말하니 우리 가족조차도 믿지 않았다. 말도 안 된다면서. 아이가 엄청 힘들었을 텐데 왜 대청봉까지 가자고 하냐면서.

해발 1,492m 지점, 오색1쉼터에서 헤어진지 거의 3시간만에 대청봉에 다녀온 이모와 만나기 직전


결국 딱 3시까지, 한 시간만 더 올라가 보기로 했다. 대청봉이 코앞이더라도 3시 전엔 하산하기로 했다. 더 이상의 시간 계획 변경은 없는 것으로 하고. 그 이후가 되면 하산하는 도중에 해가 저물 것 같았다.
아이의 컨디션과 기분도 좋아 보였고, 일반적으로 하산 시간이 짧게 걸리기도 하고 좀 더 수월하다고 생각해 내린 결정이었다.
아이의 이모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당연히 대청봉까지는 가지 못 할 것으로 판단하고 본래의 속도대로 하산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시 오를 길이었으면 좀 더 천천히 내려올 걸 그랬다고. 하지만 이미 늦은 후회였고, 아이의 이모는 우리와 함께 다시 대청봉으로 향했다.
걸으면서 대청봉에 먼저 정복한 이야기를 조금 들어봤더니, 본인을 포함해 만났던 몇 안 되는 등산객들 대부분 묵언수행하는 것 같았다고.
혼자 오르는 산행은 페이스 조절도 자유롭고 조용히 걸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좋아하는 가족끼리 도란도란 수다 떨며 오르는 맛은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대청봉을 정복하고 온 아이의 이모를 만나서 왠지 금방 대청봉에 다다르리라는 것은 큰 착각이었다.

설악산 대청봉 최단코스 해발 1573m


오후 2시 13분 이모를 만난 지 10분 정도만 걸었을 뿐인데, 숨이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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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PM
드디어 대청봉 500m 지점.

설악산 오색코스 대청봉 500m 지점


아무리 걸어도 나타나지 않을 것 같던 대청봉 0.5km 이정표와 마주했을 때, 지쳤던 우리의 몸과 마음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왠지 해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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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PM
대청봉 300m 고지


아이는 대청봉 300m 고지 앞에 주의사항 안내 푯말을 보자마자 큰소리로 읽었다. "여기서부터 정상(300m)까지는 강풍이 불고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구간입니다. 안전 장비와 보온 의류를 꼭 착용하시기 바랍니다."
지나와서 생각해보니 여기부터 바람막이를 다시 꺼내 입혀줄 걸 그랬다.

설악산 오색코스 대청봉 300m 이전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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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PM
드디어 정상


설악산 대청봉에서 공룡능선, 바람, 구름과 마주한 아이 다섯 시간 넘는 장거리 산행에 꽤 많이 지쳐 있었을 법한데도 아이는 발밑으로 내려다보이는 설악산 봉우리들의 장관을 보자마자 감격에 겨워 저절로 함성을 질렀다. 대청봉의 정상비에 다다르기 전에 펼쳐지는 설악 봉우리들의 전망을 보고 두 손을 하늘로 뻗어 "예~예~!!" 하면서 말이다. 정말 감격이 아닐 수 없었다. 비가 3~40%였던 흐린 예보에도 불구하고 정상의 하늘과 구름은 너무나 예뻤다. 대청봉에서 내려다보는 뷰는 설악산의 최고봉답게 역대급이었다.

그간 다녀왔던 설악 뷰와는 비교 불가.

설악산 최고봉 대청봉


평상시 대청봉에 오르면 사람들이 많아 줄을 서서 인증 사진을 찍기도 한다던데, 우리가 갔을 땐 한계령에서 넘어오셨다는 나이 많은 아주머님들, 우리와 같이 오색에서 출발해 백운대 방향으로 넘어갈 계획이라고 하신 사이좋아 보이셨던 부부, 식물을 연구하신다는 분, 그 외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등산객 한두 어분 정도뿐이었다. 아주 한산한 편이어서 정상봉 인증사진도 여러 번 찍고, 시간이 짧아서 아쉬웠지만,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공룡능선


아이는 이번 오색코스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이모가 눈을 가렸다가 짜잔~하면서 보여준 뾰족한 바위산(공룡능선)을 내려다본 것이라고 했다. 두 번째로 좋았던 건 시원한 바람이 너무 좋아서 더 세게 불었으면 했다고.
세 번째로 좋았던 건 다람쥐들을 만났던 거. 그다음은 대청봉을 정복한 거... 눈앞에 보이는 구름도 좋았고.


"다들 못한다고 하니까 끝까지 더 가고 싶었어. 엄마도, 아빠도, 학원 선생님도, 이모도... 다 못 갈 거라고 하니까."


아이의 대답이 신기방기해서 재차 물어보니 순위가 계속 바뀐다. 인제 그만 물어보라고. 힘든 것 빼고는 다 좋았다면서.
집에 돌아와 보라금풍뎅이 영상을 여러 번 본 것을 보니, 보라금풍뎅이를 자주 마주쳤던 것도 좋았었나 보다.

정상에서 한 식물 연구하시는 분을 만났다. 대청봉에는 몇백 번이나 지나갈 정도로 설악에 자주 다니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한눈에 바라보이는 1290봉, 황철봉, 비봉 등 대청봉을 둘러싼 봉우리들의 이름을 알려주셨다. 우리 셋의 대청봉 인증샷도 흔쾌히 찍어주셨다. 나중에 보니 사진이 너무 잘 나와서 흐뭇 :) 나도 찍어드리고 싶어 여쭤봤더니, 괜찮다고 하시다가 나중에 슬쩍 셀카를 찍고 계셔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최선을 다해 사진을 찍어드렸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중청 대피소가 보였는데, 이곳에 머물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대청봉을 둘러싼 설악 봉우리들이 펼쳐 보이는 장관을 감상하기에 20분은 너무 짧았지만, 우리는 예정대로 3시 정각에 하산을 시작했다.